맨위로가기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항하여 연합국 편에서 싸운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으로 구성된 군대이다. 이들은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와 대립하여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장악하기도 했다.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날 때 무기를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에 지원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에 기여했으며, 이들의 활약은 체코슬로바키아 육군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제1차 세계 대전의 부대 및 편성 - 샤리프군
    샤리프군은 오스만 제국 지배 하의 아라비아 반도에서 샤리프 후세인이 이끌었던 군대로, 아랍 반란을 주도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중 메카와 제다를 점령하고 다마스쿠스에 입성하는 등 아랍 반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 제1차 세계 대전의 부대 및 편성 - 라트비아 소총병
    라트비아 소총병은 1915년 러시아 제국이 라트비아인으로 창설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부대로, 볼셰비키 지지 세력으로 발전하여 러시아 내전에서 활약하며 라트비아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 러시아 백군 - 남러시아군
    남러시아군은 러시아 내전 중 백군에 속한 의용군과 돈군이 연합하여 결성되었으나, 안톤 데니킨 장군의 지휘 아래 모스크바 공세 실패 후 괴멸되었고 잔존 병력은 러시아군으로 재편되었다.
  • 러시아 백군 - 시베리아 개입
    시베리아 개입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러시아 내전 시기에 연합국이 전쟁 물자 보호,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지원, 반볼셰비키 세력 지원 등을 목적으로 시베리아 지역에 군대를 파견한 군사 작전으로, 여러 국가가 참여했으며 특히 일본은 장기간 주둔하며 복잡한 상황을 야기하여 일본의 국내 정치와 대외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문장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문장
명칭체코어: Československé legie (체스코슬로벤스케 레기에)
슬로바키아어: Československé légie (체스코슬로벤스케 레기에)
소속 국가체코슬로바키아
복무 기간1914년 ~ 1920년
구호"Nazdar" (나즈다르, "안녕하세요")
상징[[파일:Flag_of_Bohemia.svg|border|100px]]
상징 설명보헤미아 깃발 (전투 깃발)
규모
러시아71,310명
이탈리아19,476명
프랑스9,957명
기타46,871명
총합145,614명
지휘부
주요 지휘관밀란 라스티슬라프 슈테파니크
라도라 가이다
얀 시로비
스타니슬라프 체체크
요세프 슈네이다레크
지도부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의회
토마시 마사리크, 밀란 라스티슬라프 슈테파니크, 에드바르트 베네시
조직
소속제1차 세계 대전
프랑스군
프랑스 외인부대 "나즈다르!" 중대 (1915년 6월 16일까지)
자율 체코슬로바키아군 (1917년 12월 19일 이후)
러시아 제국군 (1914년–1917년)
이탈리아 왕국군 (1914년–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군단 (1918년)
러시아 내전
백군
시베리아군
목표체코슬로바키아 독립
해체체코슬로바키아군에 통합
전투
제1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
즈보로프 전투
이탈리아 전선
이손초 전선
도스 알토 전투
서부 전선
바다로의 경주
아라스 전투 (1915년)
테론 전투
러시아 내전파우스트슐라크 작전
바흐마치 전투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반란
지원 및 적대 세력
아군제1차 세계 대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제국
루마니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러시아 내전
일본 제국
미국
러시아 국가 (1918-1920년) (1919년 11월 17일까지)
적군제1차 세계 대전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내전
볼셰비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좌익 사회혁명당

2. 연합국 가담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편에서 참전했다가 러시아 제국군에 포로가 된 병력과 기타 체코인들이 연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창설했다. 이들은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여러 전투를 수행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국가 창설에 기여했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을 대체한 볼셰비키 정부가 동맹국휴전을 맺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볼셰비키와 싸우면서 러시아 내전에 휘말렸다. 국가 간 협상 결과, 독일이 점령한 동유럽 영토를 가로질러 체코슬로바키아로 갈 수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 체코 병사와 민간인들은 전쟁 및 동원에 열정적이었지만, 이후 무관심으로 바뀌었다.

군단의 연대 깃발은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수놓인 상징, 보리수 가지, 성 바츨라프의 왕관, 글자 "S", 그리고 후스파 관련 주제로 장식되었다.[9] 러시아 군단의 깃발 뒷면은 러시아 지휘부에 대한 국가 색상과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위한 체코 및 슬로바키아 색상을 보여주었다.

오스트리아 반대 저항을 이끈 망명 중인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회의는 프랑스, 영국 및 미국의 동의를 얻어 1918년 9월 26일 임시 정부가 되었다. 임시 정부 수반인 T. G. 마사리크가 거주하는 집에 체코슬로바키아 국기를 처음으로 게양하는 의식은 1918년 10월 18일에 거행되었다. 보헤미아의 역사적인 깃발을 기반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국기는 두 줄의 연결, 즉 흰색 줄이 빨간색 줄 위에 있는 것으로 정의되었다.[9]

2. 1. 러시아에서의 편성

제1차 세계 대전 초, 러시아 제국에 거주하는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은 러시아 정부에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청원했다. 그들은 삼국 협상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러시아군과 함께 싸울 체코 및 슬로바키아 의용군 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1914년 8월 5일, 러시아 스타프카는 러시아 내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으로 구성된 대대 창설을 승인했다. "동반자(''Družina'')"라고 불린 이 부대는 1914년 10월 전선으로 파견되어 러시아 제3군에 배속되었다. ''Družina'' 병사들은 정찰, 포로 심문, 적 참호 내 적군 전복 등 다양한 특수 임무를 수행했다.

체코 공화국 블란스코에서 즈보로프 전투의 체코슬로바키아인 기념비


바흐마치 전투 기념 명판, 올로모우츠


러시아와 서유럽의 체코 및 슬로바키아 정치 망명자들은 ''Družina''를 대대로부터 강력한 군사 편제로 확장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러시아 수용소에 있는 체코 및 슬로바키아 전쟁 포로 (POW)로부터 징집해야 했다. 1914년 말, 러시아 군 당국은 ''Družina''가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출신의 체코 및 슬로바키아 전쟁 포로를 징집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러시아 정부의 다른 부서의 반대로 인해 몇 주 만에 이 명령이 철회되었다. 1917년 여름까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공식적으로 전쟁 포로 징집이 금지되었으나, 일부는 러시아 군 당국과의 지역 협정을 통해 전쟁 포로를 징집하여 이 금지령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부대는 1914년부터 1917년까지 매우 천천히 성장했다. 1916년 초, ''Družina''는 제1 체코-슬로바키아 소총 연대로 개편되었다. 그해에 2개의 보병 연대가 더 추가되어 체코슬로바키아 소총 여단 (Československá střelecká brigáda|체코슬로바키아 소총 여단cs)이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1917년 7월 케렌스키 공세 기간에 즈보로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참호를 돌파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즈보로프 전투의 활약으로 러시아 임시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협의회의 망명 지도자들에게 전쟁 포로 수용소에서 체코,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의용병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해 여름 4번째 연대가 여단에 추가되어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Československý sbor na Rusi|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cs)으로 개명되었으며,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Československá legie|체코슬로바키아 군단cs)으로도 알려졌다. 1917년 10월에 4개 연대로 구성된 두 번째 사단이 군단에 추가되어 1918년까지 병력이 약 40,000명으로 증가했다.

체코인 부대의 편성은 1914년 8월에 이미 시작되었다. 같은 해 9월, 포로 출신 장교 34명, 하사관 및 병사 921명으로 구성된 '''체코 의용대'''(Чешская дружина|체코 의용대ru)가 편성되었고, 의용대 지휘관에는 러시아인 로토츠키 대령이 임명되었다. 10월 말, 의용대는 제3군 편성에 따라 남서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1915년 3월, 슬로바키아인과 체코인 포로가 의용대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남서 전선 사령부는 의용대를 높이 평가하여 연대로 승격을 권고했다. 의용대의 총수는 2,090명까지 증가했고, 1915년 12월 27일, '''제1 체코슬로바키아 저격 연대'''(1-й Чехословацкий стрелковый полк|제1 체코슬로바키아 저격 연대ru)로 개칭되었다. 1916년 여름, 2개 연대, 약 5천 명으로 구성된 '''체코슬로바키아 저격 여단'''(Чехословацк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체코슬로바키아 저격 여단ru)이 편성되었고, 트로야노프 대령이 여단장이 되었다. 1917년 7월의 갈리치아 공세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여단은 조보로바 지구의 전선을 돌파하여 3천 명 이상의 포로를 획득했다.

여단은 사단으로 승격되어 1917년 가을, 2개 사단, 3만 9천 명으로 구성된 '''제1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편성되었다. 제2 군단 편성도 계획되었으며, 러시아 혁명 당시 6만~8만 명의 체코인, 슬로바키아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러시아 제국
프랑스 육군 이탈리아 왕립 육군 러시아 제국군


2. 2. 프랑스 및 이탈리아에서의 활동

프랑스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맞서 싸우기를 원했던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외인부대에 합류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 의용병 부대에 '군단'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1914년 8월 31일, 바욘 주둔 외인부대 제2 보병 연대의 제1 중대는 주로 체코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로타 나즈다르'" ("나즈다르!" 중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중대는 1915년 5월 9일과 6월 16일 아라스 근처의 격렬한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심각한 사상자로 인해 해산되었고, 의용병들은 다양한 프랑스 부대에서 계속 싸웠다.[4]

새로운 자치 체코슬로바키아 부대는 1917년 12월 19일 프랑스 정부의 칙령에 의해 설립되었다. 1918년 1월, 제21 체코슬로바키아 소총 연대가 코냑에서 창설되었으며, 여기에는 전쟁 포로와 미국에 거주하는 의용병이 혼합되었다. 제22 체코슬로바키아 소총 연대는 그해 5월에 창설되었다.[4]

프랑스 주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이탈리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부대의 창설은 프랑스나 러시아보다 훨씬 늦게 이루어졌다. 1918년 1월, 이탈리아 제6군 사령관은 포로 수용소에서 체코,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출신의 자원병과 남슬라브족 자원병으로 소규모 정찰대를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또한 오스트리아 군대를 상대로 한 선전 활동에도 참여했다. 1918년 9월, 이 자원 정찰대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군단 제39연대가 최초의 전투 부대로 창설되었다.[5]

이탈리아 주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1918년 새롭게 창설된 제1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가장 먼저 귀국했으며, 새로운 국가 국경을 위한 전투, 특히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과의 전쟁에 즉시 투입되었다.[5]

이탈리아 주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프랑스 육군 이탈리아 왕립 육군


3.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와의 갈등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편에서 참전했다가 제정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체코인들과 기타 체코인들이 연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연합국 편에 서서 여러 전투를 수행하며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에 기여했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을 대체한 볼셰비키 정부가 동맹국휴전을 맺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볼셰비키와 싸우면서 러시아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국가 간 협상 결과, 독일이 점령한 동유럽 영토를 통해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서유럽으로 귀환하는 긴 여정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볼셰비키와 마찰을 빚어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일시적으로 장악하기도 했다.

러시아 내전에서의 병력 이동. 짙은 회색 선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포함한 백군 세력의 최대 진격을 보여준다.


1917년 11월, 볼셰비키는 러시아 전역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동맹국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위원회 의장 토마시 마사리크는 군단이 동맹국에 맞서 계속 싸울 수 있도록 러시아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의 주요 항구가 봉쇄되었기 때문에, 마사리크는 군단이 우크라이나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약 9656.04km의 긴 여정을 거쳐 서유럽으로 수송될 선박을 타기로 결정했다.[10][11]

1918년 2월, 우크라이나의 볼셰비키 당국은 마사리크와 군단에게 블라디보스토크로의 이동을 허가했다. 그러나 2월 18일, 독일군은 동부 전선에서 파우스트작전을 시작했고,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3월 5일부터 13일까지 바흐마치 전투에서 독일군의 방해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12]

소비에트 러시아에 진입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위원회 대표들은 볼셰비키 당국과 협상을 통해 군단의 철수 세부 사항을 조율했다. 3월 25일, 양측은 펜자 협정을 체결하여 군단이 대부분의 무기를 넘겨주는 대가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방해받지 않고 이동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양측의 불신으로 긴장이 고조되었고, 볼셰비키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반혁명 세력과 합류할 것을, 군단은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군단을 전복시킬 것을 우려했다.[13]

1918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따라 펜자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흩어져 있었다. 철도 상태 불량, 기관차 부족, 현지 소비에트와의 협상 등으로 철수가 지연되었다. 5월 14일, 첼랴빈스크 역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군단과 서쪽으로 향하는 헝가리인 전쟁 포로 간의 분쟁이 발생하자, 전쟁 인민 위원 레프 트로츠키는 군단의 완전한 무장 해제와 체포를 명령했다. 며칠 후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군대 회의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무장 해제를 거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에 대한 최후 통첩을 발표하며, 이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을 촉발했다.[14]

볼셰비키에 의해 죽임을 당한 러시아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제8 연대 병사들 (니콜스크-우수리스키), 1918년. 그들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다른 구성원들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 (1918)


1918년 5월 말부터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볼셰비키 간의 전투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여러 지점에서 발생했다. 6월 말까지 미하일 디테리흐스 장군 휘하의 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장악하고 현지 볼셰비키 행정부를 전복시켰다. 7월 6일, 군단은 도시를 연합 보호령으로 선언하고,[15] 서쪽에서 싸우는 동료들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초기에 적군과의 교전에서 승리했다.

7월 중순까지 군단은 사마라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철도를 장악했고, 9월 초까지 시베리아 횡단 철도 전체에서 볼셰비키 군대를 몰아냈다. 군단은 예카테린부르크를 포함한 시베리아의 주요 도시들을 정복했지만,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은 군단 도착 직전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의 명령에 의해 로마노프 왕가 처형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장갑 열차 "오를리크", 러시아


1918년 여름, 시베리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작전은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국 정치가들에게 환영받았으며, 독일을 상대로 동부 전선을 재건하는 수단으로 여겨졌다.[16]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시베리아에서 군단의 철수를 지원하라는 압력에 굴복하여, 1918년 7월 초 미국과 일본이 시베리아에 제한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하는 각서(aide-mémoire)를 발표했다.[17]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과 일본 부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이미 그들을 환영하고 있었다.[18]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시베리아 작전은 연합국 정치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독립된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군단이 그해 여름 승리를 거듭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국가 평의회는 여러 연합국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승인 성명을 받기 시작했다.

볼셰비키에 대항하여 적대 행위에 들어간 직후, 군단병들은 반볼셰비키 러시아인들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사마라의 사회혁명당이 이끄는 코무치와 옴스크의 시베리아 임시 정부가 대표적이었다. 코무치 인민군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도움으로 카잔 점령과 1918년 8월 6-7일에 있었던 제국 국립 금 보유고 탈취 등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압력은 시베리아의 반볼셰비키 세력이 1918년 9월 우파에서 열린 회의에서 결성된 전 러시아 임시 정부를 지지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9]

1919년 2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채택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제1강습대대 깃발


1918년 가을, 러시아에서의 전투에 대한 군단병들의 열정은 급격히 떨어졌다. 미국에 있던 T. G. 마사리크 교수는 그들을 지원했다.[20] 붉은 군대는 날마다 강해졌고, 9월 10일에는 카잔을, 한 달 후에는 사마라를 탈환했다. 그해 초 약 61,000명으로 정점에 달했던 군단병들은,[21] 신뢰할 만한 증원을 받지 못하고 다른 국가의 연합군 병사들이 전선에 합류하지 못한 것에 실망했다.

10월 28일, 프라하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국가가 선포되면서 병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1918년 11월 18일, 옴스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전 러시아 임시 정부가 전복되고,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이 통제하는 독재 정부가 백군 시베리아에 들어서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1918-1919년 겨울 동안,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전선에서 철수하여 노보니콜라예프스크와 이르쿠츠크 사이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 노선을 파르티잔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했다. 시베리아에서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출신 포로들로 구성된 다른 군단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군은 1919년 한 해 동안 콜차크 정부의 유일한 보급로를 방어했다.

볼셰비키와의 휴전이 체결되었을 때, 수십 대의 체코슬로바키아 열차가 여전히 이르쿠츠크 서쪽에 있었다. 1920년 3월 1일, 마지막 체코슬로바키아 열차가 그 도시를 통과했다. 군단의 진군은 일본 파견군과 그리고리 세묘노프 아타만의 군대에 의해 방해받았는데,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열차의 진행을 지연시켜 적군이 시베리아 동부에 도착하는 것을 늦추려 했다. 그 무렵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철수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마지막 군단병들은 1920년 9월에 항구를 떠났다.

러시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함께 철수한 총 인원은 67,739명이었다. 이 중에는 56,455명의 병사, 3,004명의 장교, 6,714명의 민간인, 1,716명의 부인, 717명의 어린이, 1,935명의 외국인 및 198명의 기타 인원이 포함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로 귀환한 후,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체코슬로바키아군의 핵심을 형성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내전 동안 러시아에서 사망한 군단병의 수는 4,112명이었다. 얼마나 많은 수가 실종되었거나 군단을 탈영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고된 여정을 떠나거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후자 중에는 풍자 소설 《착한 병사 슈베이크》의 작가인 야로슬라프 하셰크가 있었다.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날 때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 일부가 북로군정서로 흘러들어갔다.[40] 이들은 백군이 아닌 외국군으로서 적군과 싸운 최초의 군대가 되었다.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적군에 가담한 일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적군인 공산군의 모태가 되었다. 서유럽으로 귀환한 뒤 대부분의 인력은 새로 창설된 체코슬로바키아 육군에 소속되었으며 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항구를 통해 프랑스로 가기 직전, 중광단의 사령관 김좌진에게 체코제 무기를 지원해주기도 하였다.[40]

3. 1.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10월 혁명 이후 1918년 3월 3일, 볼셰비키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과 단독 강화했다. 체코 군단은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위해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고, 미국 경유의 해로로 서부 전선으로 건너가는 것이 결정되었지만, 1918년 3월 중순까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40]

1918년 3월 26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 위원회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회의 러시아 지부와 조약을 체결하여, 체코 군단 장병들이 무장 해제하고 민간인으로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는 것을 허가했다.

1918년 4월 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군복을 입은 강도가 2명의 일본인을 살해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2개 중대가 시내로 진주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를 대규모 간섭의 시작으로 보고, 체코 군단의 이동 중지를 명령했다. 4월 10일, 블라디보스토크 당국은 일본군의 증파가 없음을 보고했고, 12일, 레닌은 중지 명령을 취소했다. 그러나, 이 며칠간의 지연은 체코 군단 장병들에게 강한 불만을 일으켰다.

1918년 5월 시점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1만 4천 명이 이미 도착했고, 노보니콜라예프스크(현 노보시비르스크)에는 4천 명, 첼랴빈스크에는 8천 명, 펜자에는 8천 명의 체코 군단 장병이 있었다.

구 소련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체코 군단의 봉기는 1918년 5월 14일, 첼랴빈스크역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병사와 헝가리 병사 간의 난투가 원인이었다. 첼랴빈스크의 볼셰비키 당국은 난투에 연루된 체코슬로바키아인을 체포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병사들은 무력으로 동지를 탈환하고 적위대를 무장 해제하고, 시내의 무기고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크게 확대되지 않고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볼셰비키 중앙은 체코 군단의 즉시 무장 해제와 무장 병사의 사살을 지시했다. 이때 무장 병사가 한 명이라도 발견되면 부대 전체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5월 26일, 레프 트로츠키는 체코 군단을 반란군으로 선언하고 공격을 지시했다.

당시 체코 군단 사령관은 파리에 있던 군무 경험이 없는 토마시 마사리크 교수(Tomáš Garrigue Masaryk)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현지 지휘관이 없는 상태였다. (러시아 제국 붕괴 후 체코 군단은 형식상 프랑스 육군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체코 군단은 크게 4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다.

그룹명병력지휘관
펜자 그룹8천 명스타니슬라프 체체크 중위 (후에 대령. 1918년 7월 17일부터 러시아 인민군 사령관)
첼랴빈스크 그룹8천 명세르게이 보이체호프스키 중좌 (러시아인, 제3 체코슬로바키아 연대장)
시베리아 그룹4천 명라들라 가이다 (루돌프 게이들) 대위 (체코슬로바키아인 중 최고위 장교, 제7 연대장)
동부 그룹1만 4천 명미하일 디테리흐스 장군 (러시아인,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참모장)



이 4대 그룹 외에도 슈베츠 중위 (후에 대령, 제1 체코슬로바키아 사단장), 얀 시로비 중위 (후에 장군,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장), 러시아인 우샤코프 중좌 (1918년 6월 전사)가 이끄는 그룹이 존재했다.

4. 러시아 내전 개입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편으로 참전했다가 러시아 제국군에 포로로 잡힌 체코인들과 기타 체코인들이 연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결성했다. 이들은 연합국 편에 서서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에 기여했다.

러시아 혁명으로 볼셰비키 정부가 동맹국휴전을 맺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러시아 내전에 휘말렸다. 이들은 백군이 아닌 외국군으로서 적군과 싸운 최초의 군대가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당초 독일이 점령한 동유럽 영토를 가로질러 귀국할 수 없었다. 국제 협상 결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동하여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서유럽으로 귀환하는 경로를 택했다. 이 과정에서 볼셰비키 측과 마찰을 빚어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일시적으로 장악하기도 했다.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날 때, 그들이 보유했던 무기 일부가 북로군정서로 흘러들어갔다.[40]

소비에트 러시아의 적군에 가담한 일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원은 훗날 체코슬로바키아 공산군의 모태가 되었다. 서유럽으로 귀환한 군단원 대부분은 새로 창설된 체코슬로바키아 육군에 소속되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통해 프랑스로 가기 직전 김좌진에게 체코제 무기를 지원하기도 했다.[40]

4. 1. 반볼셰비키 세력 지원

1917년 11월, 볼셰비키가 러시아 전역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동맹국과 평화 협상을 시작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위원회 의장 토마시 마사리크는 군단의 러시아 탈출 및 프랑스 이송을 계획했다. 주요 항구가 봉쇄되었기 때문에, 군단은 우크라이나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서유럽으로 수송될 예정이었다.[10]

1918년 2월, 우크라이나의 볼셰비키 당국은 마사리크와 그의 군대에게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약 9656.04km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허가했다.[11] 그러나 독일군이 동부 전선에서 파우스트작전을 시작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3월 5일부터 13일까지 바흐마치 전투에서 독일군의 철수 저지 시도를 격퇴했다.[12]

우크라이나를 떠나 소비에트 러시아에 진입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위원회 대표들은 볼셰비키 당국과 군단 철수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다. 3월 25일, 양측은 펜자 협정을 체결하여 군단이 대부분의 무기를 넘겨주는 대가로 블라디보스토크로의 이동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양측의 불신으로 긴장이 고조되었고, 볼셰비키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반혁명 세력과 합류할 것을, 군단은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전복 시도를 우려했다.[13]

1918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따라 펜자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흩어져 있었다. 철도 상태 불량, 기관차 부족, 현지 소비에트와의 협상 필요성 등으로 철수가 지연되던 중, 5월 14일 첼랴빈스크 역에서 발생한 분쟁으로 인해 레프 트로츠키는 군단의 무장 해제 및 체포를 명령했다. 며칠 후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군대 회의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무장 해제를 거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에 대한 최후 통첩을 발표하며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을 촉발했다.[14]

1918년 5월 말부터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볼셰비키 간의 전투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 여러 곳에서 발생했다. 6월 말까지 미하일 디테리흐스 장군 휘하의 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장악하고 현지 볼셰비키 행정부를 전복시켰다. 7월 6일, 군단은 도시를 연합 보호령으로 선언하고,[15] 서쪽에서 싸우는 동료들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초기 교전에서 대체로 승리했다.

7월 중순까지 군단은 사마라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철도를 장악했고, 9월 초까지 시베리아 횡단 철도 전체에서 볼셰비키 군대를 제거했다. 군단은 예카테린부르크를 포함한 시베리아 주요 도시를 정복했지만,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은 군단 도착 직전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의 명령에 의해 로마노프 왕가 처형되었다.

1918년 여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시베리아 작전은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 정치가들에게 환영받았고, 동부 전선 재건의 수단으로 여겨졌다.[16]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시베리아에서 군단의 철수를 지원하라는 압력에 굴복하여, 1918년 7월 초 미국과 일본의 제한적 개입을 요구하는 각서(aide-mémoire)를 발표했다.[17]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과 일본 부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이미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18]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시베리아 작전은 연합국 정치가들에게 독립된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군단이 그해 여름 승리를 거듭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국가 평의회는 여러 연합국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승인 성명을 받기 시작했다.

볼셰비키에 대항하여 적대 행위에 들어간 직후, 군단병들은 반볼셰비키 러시아인들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사마라의 사회혁명당이 이끄는 코무치와 옴스크의 시베리아 임시 정부가 대표적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도움으로 코무치 인민군은 카잔 점령 및 제국 국립 금 보유고 탈취 등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압력은 시베리아의 반볼셰비키 세력이 1918년 9월 우파에서 열린 회의에서 결성된 전 러시아 임시 정부를 지지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이었다.[19]

1918년 가을, 러시아에서의 전투에 대한 군단병들의 열정은 급격히 떨어졌다. T. G. 마사리크 교수는 미국에서 그들을 지원했다.[20] 붉은 군대는 날마다 강해지고 있었고, 9월 10일에는 카잔을, 한 달 후에는 사마라를 탈환했다. 그해 초 약 61,000명으로 정점에 달했던 군단병들은,[21] 신뢰할 만한 증원을 받지 못하고 다른 국가의 연합군 병사들이 전선에 합류하지 못한 것에 실망했다.

10월 28일, 프라하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국가가 선포되면서, 병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1918년 11월 18일, 옴스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전 러시아 임시 정부가 전복되고,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이 통제하는 독재 정부가 백군 시베리아에 들어서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사기는 결정타를 맞았다.

1918-1919년 겨울 동안,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전선에서 철수하여 노보니콜라예프스크와 이르쿠츠크 사이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 노선을 파르티잔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했다. 시베리아에서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출신 포로들로 구성된 다른 군단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군은 1919년 한 해 동안 콜차크 정부의 유일한 보급로를 방어했다.

1919년 여름과 가을 동안, 콜차크군은 적군의 동부군 집단으로부터 꾸준히 후퇴했다. 11월 14일, 적군은 콜차크의 수도인 옴스크를 점령했고, 이는 백군과 난민들이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따라 동쪽으로 도주하는 결과를 낳았다. 향수병에 걸린 군단병들은 중립을 선언하고 반란 진압에 소극적이었다.[22]

카잔에서 빼앗은 금괴를 포함한 콜차크의 열차가 니즈네우딘스크 근처 철도에 갇히자, 시베리아에 있는 연합국 대표들은 군단병들에게 그를 이르쿠츠크에 있는 영국 군사 임무단으로 호송하라고 명령했다. 군단병들은 사령관인 자닌 장군과 시로비 장군과 상의한 후, 콜차크를 이르쿠츠크에서 사회혁명가들이 결성한 정부인 정치 센터에 넘기는 결정을 내렸다.[22]

1920년 2월 7일, 군단병들은 쿠틴에서 제5 적군과 휴전을 체결했고, 적군은 체코슬로바키아군에게 블라디보스토크로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가로 군단병들은 콜차크를 구출하려 시도하지 않고, 남은 금괴를 이르쿠츠크 당국에 넘기기로 동의했다. 그날 초, 콜차크는 체카 사격대에 의해 처형되었다.[22] 그의 시신은 얼어붙은 앙가라강의 얼음 아래에 버려졌고, 영원히 회수되지 못했다.[23]

백군이 처형 사실을 알게 되자, 남은 지도부는 더 동쪽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대 시베리아 얼음 행군이 이어졌다. 적군은 3월 7일에야 이르쿠츠크에 진입했고, 그제서야 콜차크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이 때문에, 그리고 1919년 11월 17일 라돌라 가이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한 백군에 대한 반란 시도 때문에, 백군은 체코슬로바키아군을 반역죄로 비난했지만, 그들을 상대로 행동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1920년 처형되기 전에 찍은 콜차크의 마지막 사진

4. 2. 연합군의 개입과 좌절

볼셰비키가 1917년 11월 러시아 전역에서 권력을 장악한 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동맹국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위원회 의장 토마시 마사리크는 군단이 우크라이나에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로 이동하여 서유럽으로 수송될 선박을 타도록 계획했다.[10] 1918년 2월, 우크라이나의 볼셰비키 당국은 마사리크와 그의 군대에게 약 9656.04km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허가했다.[11]

우크라이나를 떠나 소비에트 러시아에 진입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위원회 대표들은 볼셰비키 당국과 모스크바와 펜자에서 군단의 철수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정리하기 위한 협상을 계속했다. 1918년 3월 25일, 양측은 펜자 협정을 체결했는데, 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방해받지 않고 이동하는 대가로 대부분의 무기를 넘겨주기로 했다. 그러나 양측의 불신으로 긴장이 고조되었고, 1918년 5월 14일 첼랴빈스크 역에서 발생한 분쟁으로 인해 레프 트로츠키는 군단의 완전 무장 해제와 체포를 명령했다. 며칠 후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군대 회의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무장 해제를 거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에 대한 최후 통첩을 발표하며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을 일으켰다.[14]

1918년 5월 말부터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볼셰비키 사이에 전투가 발생했다. 6월까지 양측은 펜자에서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철도 노선을 따라 전투를 벌였고, 그 달 말 미하일 디테리흐스 장군 휘하의 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장악하고 현지 볼셰비키 행정부를 전복시켰다. 7월 6일, 군단은 도시를 연합 보호령으로 선언하고,[15] 서쪽에서 싸우는 동료들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1918년 여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작전은 영국과 프랑스 연합국에게 독일을 상대로 동부 전선을 재건하는 수단으로 여겨졌다.[16]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시베리아에서 군단의 철수를 지원하라는 압력에 굴복하여, 1918년 7월 초 미국과 일본의 제한적인 시베리아 개입을 요구하는 각서(aide-mémoire)를 발표했다.[17]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과 일본 부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18]

1918년 4월 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생한 일본인 피살 사건으로 일본군이 시내로 진주하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체코 군단의 이동 중지를 명령했다가 며칠 후 취소하는 등 혼란이 있었다.

1918년 8월, 프랑스 정부는 모리스 자냉 장군을 시베리아로 파견하여 체코 군단을 통제하려 했으나, 자냉은 1918년 12월에 옴스크에 도착했다. 1919년 1월,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체코 군단의 담당 지역을 지정하고, 1년 가까이 러시아에 머물게 했다.

4. 3. 콜차크 정부와의 갈등과 철수

10월 혁명 이후 1918년 3월 3일, 볼셰비키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 조약을 맺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위해 체코 군단은 시베리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 후, 미국을 경유하는 해로를 통해 서부 전선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18년 3월 중순까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 및 오스트리아군과 계속 전투를 벌여야 했다.[12]

1918년 3월 26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 위원회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회의 러시아 지부와 조약을 체결하여, 체코 군단 병사들이 무장 해제 후 민간인 신분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는 것을 허가했다.

1918년 4월 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군복을 입은 강도가 일본인 2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군 2개 중대가 시내로 진주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를 대규모 간섭의 시작으로 판단하여 체코 군단의 이동 중지를 명령했다. 4월 10일, 블라디보스토크 당국은 일본군의 증파가 없음을 보고했고, 12일, 레닌은 중지 명령을 취소했다. 그러나 이 며칠간의 지연은 체코 군단 병사들에게 큰 불만을 야기했다.[13]

1918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미 1만 4천 명이 도착했고, 노보니콜라예프스크(현재 노보시비르스크)에는 4천 명, 첼랴빈스크에는 8천 명, 펜자에는 8천 명의 체코 군단 병사들이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1918년 8월, 볼셰비키 체제 제거를 원했던 프랑스 정부는 체코 군단의 행동 통제에 나섰다. 그동안 독일-볼셰비키에 대한 동부 전선 구축 임무를 띤 모리스 자냉 장군이 시베리아로 파견되었으나, 12월이 되어서야 옴스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1918년 10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체코 군단 병사들은 조기 귀국을 희망하게 되었다. 일부 부대는 전선을 이탈하여 동쪽으로 향하는 열차에 탑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25일, 제1 체코슬로바키아 사단장 요제프 슈베츠 대령이 자결했다.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했고, 11월 초, 체코 군단은 우파 및 첼랴빈스크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11월, 자냉 장군은 시베리아 주둔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어떤 간섭국의 부대도 그의 지휘하에 들어오지 않았고, 휘하 부대는 블라디보스토크의 1개 중대뿐으로, 사실상 명목상의 지위에 불과했다. 이에 자냉은 알렉산드르 콜차크 군을 지원하는 동시에 체코 군단 장악을 시도했다. 클레망소 총리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1919년 1월 27일, 노보니콜라예프스크(노보시비르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 연선이 체코 군단의 담당 지역으로 지정되었고, 프랑스는 체코 군단을 1년 가까이 더 러시아에 머물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대해 6월, 체코 군단 내에서 반란이 발생했지만 진압되었다. 체코 군단 병사들의 철수는 1919년 1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1920년 1월, 자냉 장군은 콜차크를 볼셰비키 측에 넘기도록 체코 군단에 명령했다.[22]

제1차 세계 대전부터 러시아 내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체코 군단은 4천 명 이상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볼셰비키 측으로 전향한 사람은 218명에 불과했다.

5. 한국과의 관계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날 때 가지고 있던 무기 일부가 북로군정서로 흘러들어갔으며, 중광단의 사령관 김좌진에게 체코제 무기를 지원해주기도 하였다.[40]

6.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2013년 6월 30일 기념식에서 프랑스 주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제복을 입은 부대


프라하에 있는 레기오방카 본사 외관은 전쟁 장면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1918년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는 붕괴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며, 토마시 가리구에 마사리크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구성원들은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했다.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군사 임무가 체코 영토에서 시작되었으며, 모리스 펠레 장군이 이끌었다. 슬로바키아에서 이탈리아가 이끄는 체코군과 약간의 의견 불일치가 있은 후,[30] 마사리크 대통령은 1919년 7월 4일 피치오네를 펠레로 교체하면서 군단과의 이탈리아 관계를 사실상 종식시켰다.[31]

프랑스 군사 임무의 역할은 기존의 체코슬로바키아 외국 군단을 군대의 국내 부대와 통합하고 전문적인 지휘 구조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1919년 10월 15일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참모 본부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프랑스 장교들은 지역 사령관과 일부 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200명의 프랑스 부사관, 100명이 넘는 장교, 19명의 장군이 있었다. 펠레 장군과 그의 후임자인 외젠 미텔호이저 장군(역시 프랑스인)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초대 참모총장이었다.

군단은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전쟁에 참전했다. 1919년 1월 1일, 군단 병력은 브라티슬라바 시를 점령했고, 이탈리아의 리카르도 바레카 대령이 그 도시의 군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여러 차례 충돌(최소 9명의 헝가리 시위대 사망)이 발생했고 바레카 본인도 부상을 입었다. 이탈리아 장교들은 전쟁 중 헝가리에 대한 작전을 계속 지원했다. 많은 군단 참전 용사들은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전쟁에도 참전했다.

군단 참전 용사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병 협회(''Československá obec legionářská'') 및 레기오방카(''Legionářská banka'', 오랜 복무 기간 동안 모은 자본으로 설립된 은행)와 같은 단체를 결성했다. 이 단체들과 다른 단체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지지했기 때문에 ''프라하 성''("The [Prague] Castle")으로 알려졌다.

6. 1. 주요 참전 인물


  • 얀 시로비 - 체코 군단 사령관이었다. 나중에 대독 협력자로 체포되었다.
  • 스타니슬라프 체체크 - 펜자 그룹 지휘관이었다.
  • 라돌 가이다 - 첼랴빈스크 그룹 지휘관이었다. 나중에 대독 협력자로 소련에 의해 투옥되었다.
  • 루드비크 스보보다 - 후에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이 되었다.
  • 루돌프 비에스트 - 후에 슬로바키아 민중 봉기에 참가했으며, 독일 국방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 에두아르트 카드레츠
  • 블라디미르 크레찬다

참조

[1] 웹사이트 Nad Tatrou sa blýska - (10) https://www.valka.cz[...] 2014-05-17
[2] 웹사이트 Češi bojovali hrdinně za Rakousko-Uhersko, ale první republika to tutlala http://zpravy.idnes.[...] 2008-10-27
[3] 서적 The Genesis of Czechoslovakia East European Monographs 1986
[4] 서적 Genesis
[5] 웹사이트 Vhu Praha http://www.vhu.cz/ex[...]
[6] 웹사이트 Vhu Praha http://www.vhu.cz/ex[...]
[7] 웹사이트 Vhu Praha http://www.vhu.cz/ex[...]
[8] 웹사이트 Vhu Praha http://www.vhu.cz/ex[...]
[9] 웹사이트 History of the flag of the Czech http://www.czechgall[...]
[10] 서적 Revolutionary War and the Russian Question Abhinav 1977
[11] 서적 The Making of a State Frederick A. Stokes 1927
[12] 서적 The March of the Seventy Thousand Leonard Parsons 1926
[13] 서적 The Bolsheviks and the Czechoslovak Legion Abhinav 1978
[14] 서적 Bolsheviks
[15] 웹사이트 Czech troops take Russian port of Vladivostok for Allies – Jul 6, 1918 http://www.history.c[...] 2016-06-22
[16] 서적 Soviet-American Relations: The Decision to Interven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8
[17] 서적 Decision to Intervene
[18] 서적 From Victoria to Vladivostok: Canada's Siberian Expedition, 1917–19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Press
[19] 서적 A People's Tragedy Viking 1997
[20] 서적 Masaryk a legie (Masaryk and legions) Paris Karviná 2019
[21] 서적 Essays on World War I Brooklyn College Press 1983
[22] 서적 Civil War in Siber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23] 서적 The Fate of Admiral Kolchak Harcourt, Brace, & World, Inc 1963
[24] 서적 The Czech and Slovak Legion in Siberia 1917–1922 McFarland 2012
[25] 뉴스 Transport Movements https://www.newspape[...] San Francisco Chronicle 1920-07-05
[26] 뉴스 Arrived https://www.newspape[...] New York Herald 1920-07-31
[27] 웹사이트 How did the Czech Legion get home? https://history.stac[...] 2024-08-15
[28] 뉴스 Eastern and Foreign Ports https://www.newspape[...] San Francisco Examiner 1920-10-12
[29] 서적 Československá vojenská symbolika 1914-1939 https://www.vhu.sk/d[...] Vojenský historický ústav 2013
[30] 웹사이트 20. ledna 1919 dokončeno osvobozování Slovenska Čs. armádou a dobrovolníky http://www.svornost.[...]
[31] 서적 France and her Eastern Allies 1919-1925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62
[32] 웹사이트 Přál jsem si míti křídla - Josef Dufka | Databáze knih https://www.databaze[...]
[33] 웹사이트 'A Czechoslovakian epic': the Czechoslovak Legion in the Russian Revolution - European studies blog https://blogs.bl.uk/[...]
[34] 웹사이트 Galerie osobností města Nového Jičína https://galerieosobn[...]
[35] 웹사이트 Jízdní hlídka https://www.csfd.cz/[...]
[36] 웹사이트 Last Train Home turns World War 1 history into a strategy game https://www.digitalt[...] 2023-06-12
[37] 웹사이트 'Last Train Home' trailer reveals a gritty strategy set in the aftermath of WW1 https://www.nme.com/[...] 2023-06-12
[38] 웹사이트 Nová hra z Brna vypráví příběh československých legií v Rusku https://www.vortex.c[...] 2023-06-12
[39] 웹사이트 Last Train Home s českým dabingem přinese strastiplný návrat československých legionářů https://indian-tv.cz[...] 2023-06-12
[40] 뉴스 대종교 무장독립투쟁 - 북로군정서 조직과 활동 http://www.tongilnew[...] 2015-07-2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